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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사실 처음에는 쉬포나를 이곳에서 해방하고, 나아가 함께 데려가면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가고픈 의지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쉬포나는 이제 복수조차 바라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단지 편히 쉬는 것.
그녀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원동력마저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런 쉬포나의 모습에 내 선택은 이미 반쯤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처음 눈치챘을 때부터 내가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도쿄 대미궁이 눈치챌 것이라 연신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듣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가 이곳 바다 건너 도쿄 대미궁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여의주의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지금껏 죽이지 못한 몬스터가 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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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워볼사이트 이상 쓸데없이 눈치를 보는 것은 사양이다.
너에게 대책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대책을 사용할 시간이다.
일해라, 미궁. 파워볼게임
[정말 합리적이지 못하네. 그냥 눈 딱 감고 무시하면 될 것을.] 짧게 혀를 차면서도 녀석은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딱히 못마땅하다는 엔트리파워볼 느낌도 없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조금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EOS파워볼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잠시 로투스바카라 자리를 비울게.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노발대발할 녀석을 달래줘야 하거든.] ‘시간을 끌 생각인가?’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있고. 아예 너한테 손을 못 쓰게 할 방법도 따로 있어. 그러니까 너는 나만 믿고, 열심히 죽이고 있으라고. 기왕 이리된 거 최대한 많이 죽이는 거야. 할 수 있지?] ‘살육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특기기는 하지.’ 덤덤히 답하는 나를 향해 녀석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아. 그럼 가볼게.] 그리 말한 미궁은 별다른 티도 없이 곧장 떠나갔다.
그에 나 역시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제 간절한 소망이 곧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생기 넘치는 눈으로 쉬포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나는 마침내 그녀의 오랜 소망을 이루어 주었다.
[고맙다, 닉스여.]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오랜 시간 갇혀 지내던 뱀이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었다.
여의주로 적지 않은 에너지가 쌓인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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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로가. 아니, 세상이 크게 흔들렸다.
아끼던 제 수집품의 죽음에 미궁이 분노하기라도 한 것일까?
출처를 모를 정체불명의 살기와 함께 마력이 거세게 요동친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나밖에 없는 텅 빈 방에서 펼쳐졌다.
아직 직접 무언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미궁이란 존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SSS랭크가 되며 더 이상 적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감이 단번에 사라진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이라면 충분히 미궁에게도 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은연중에 품던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격이란 게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공간 그 자체를 뒤흔들던 거센 진동은 어느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출처 불명의 살기 역시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직 내게 별일이 없는 것을 본다면 아무래도 녀석이 잘 해결한 모양이다.
처음 미궁 그 자체가 흔들릴 때는 한순간이나마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녀석이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해냈으니 나 역시 내 할 일을 해낼 차례였다.
서둘러 움직이자.
더 이상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생각은 없다.
전력으로 이 미로를 주파하고, 미궁주를 쓰러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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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닉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사이, 두 미궁의 만남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온통 어두컴컴한 텅 빈 곳에서 분홍 슬라임 하나가 통통 튀어 올랐다.
그런 슬라임을 향해 목소리가 울린다.
【이게 무슨 짓이지, 001-002? 규율을 어길 생각인가?】 높낮이 없이 차분한 목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분노를 숨길 수는 없었다.
SSS랭크의 몬스터마저 한순간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강대한 살기 앞에서 분홍 슬라임은 태평히 튀어 올랐다.
[내가 지금 많이 낮춘 상태거든? 그러니까 너도 무게 그만 잡고 적당히 낮추면 안 될까?] 【너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001-002. 저런 장난감을 만들어 침입하다니. 규율을 어길 생각인가?】 태평한 분홍 슬라임과 달리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바로 앞전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듯한 목소리에 퐁퐁 열심히 뛰어오르던 슬라임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딱히 규율을 어길 생각은 없는데?] 【그럼 저건 도대체 뭐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겠다면, 규율을 어긴 것으로 알고서….】 [그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줄 테니 일단 좀 낮춰 보라니까? 안 그래도 연비가 안 좋을 텐데, 계속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거야?] 툭 내뱉는 목소리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퐁퐁 튀어 오르는 분홍 슬라임의 앞으로 새하얀 빛의 형상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모여든 빛은 이윽고 작은 새가 되었다.
[무례한 침입자 놈이 정말 바라는 게 많구나. 네놈 말대로 적당히 낮추었으니 이제 한번 이유를 말해봐라. 만약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슬며시 저를 노려보는 작은 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태평한 모습으로 슬라임이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딱히 규율을 어긴 적 없어.] [헛소리가 늘었군. 그렇다면 당장 네 녀석과 함께 침입한 저것은 뭐지?] [저것이라 낮잡아 부르지 말아 줄래? 엄연히 닉스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구.] [헛소리는 작작하고 제대로 된 변명부터 하는 게 좋을 거다. 혹여 괜한 말로 지금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라면….] [흠.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는 한데, 참고로 닉스의 성장에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흥.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을 입에 담는군.] [거짓이 아니야. 알잖아? 나 거짓말은 안 하는 거.] 태평히 내뱉는 슬라임을 향해 작은 새가 한차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군. 모두를 통틀어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놈이.] [흠. 그런 억측은 조금 억울한데 말이지. 내가 얼마나 정직한데….] [헛소리는 작작해라, 001-002. 네가 관여하지 않고서 몬스터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가만히 노려보는 시선에 슬라임이 한차례 몸을 으쓱거렸다.
[정 못 믿겠다면 내 코어에 맹세할게. 나는 닉스의 성장에 전혀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어. 시스템도 쥐여준 적 없고.] […믿을 수 없다. 정말인가?] [코어에 맹세한다니까.] 재차 몸을 으쓱거리는 슬라임의 모습에 작은 새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몬스터 손에 시스템이 들어간 거지? 설계상 그럴 수가 없는데….] [정확히는 원 몬스터가 아니거든. 지금은 내가 많이 가려놔서 안 보일 텐데… 슬쩍 보여 줄 테니까 한번 봐봐.] 그리 말한 슬라임의 목소리를 끝으로 작은 새가 한차례 눈가를 좁히며 텅 빈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조용히 탄성을 내뱉는다.

[…놀랍군. 원래는 바깥의 토착종이었나?] [천운 끝에 탄생한 이레귤러지. 어때,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어?] […네놈이 코어를 걸었으니 믿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규율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흐음. 또 뭔데? 나는 규율을 어긴 적이 없다니까.] 퐁퐁- 튀어 오르며 한껏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슬라임의 모습에 작은 새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에게 네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끼리는 간섭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 이렇게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감히 내 수집품까지 멋대로 죽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작은 새는 한눈에 보일 정도로 커다란 분노를 드러냈다.
씩씩거리며 잔뜩 흥분한 작은 새의 모습에 슬라임이 자그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규율 같은 것보다 네 수집품을 건드려서 화가 났구나?] [수천 년 동안 모아온 컬렉션 중 하나가 지금 네놈과 저것 때문에 완전히 망가졌다. 이는 단순한 사과로는 끝나지 않을 줄 알아라. 네놈도 알맞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그래, 가령 저기 저것 같은 걸로 말이지.] 흘깃 텅 빈 허공을 바라보는 작은 새의 눈은 어느새 진득한 탐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잃게 된 뱀 대신에 새로운 뱀을 얻으려는 생각일까?
그 생각이 훤히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욕심에 슬라임이 작게 혀를 찼다.
[안타깝지만, 닉스는 못 넘겨줘.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 앞으로 두고두고 함께할 거란 말이지.] [흥. 네놈이 저것을 넘겨주지 않겠다면 나도 다른 수가 없지. 이번에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해서 모두에게 정식으로 이야기하겠다. 제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이번 건만큼은….] [오. 우리 닉스 잘한다. 방금 봤어? SS랭크 몬스터를 꼬리치기 한 방으로 녹다운 시키는 거. 엄청 대단하지 않아?] 태평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한순간 커다란 마력이 폭발했다.
강렬한 분노에 힘입어 다시 한번 미궁이 요동친다.
【저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내 소중한 컬렉션을…!】 어두컴컴한 공간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격한 노성.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진득한 살의까지 드러내는 또 다른 미궁의 모습에 슬라임이 퐁퐁 튀어 올랐다.
[우리 닉스 잘한다, 잘해~ 이야, 에너지 참 달달하네. 더 죽이자, 더 죽여. 모조리 죽이는 거야.] 【001-002…! 이번 일은 절대 가만히 두고 넘어가지 않겠다! 규율을 어긴 대가를 확실히 치르게 해주겠어!】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규율을 어긴 적이 없다니까.] 【네놈이 정녕 아직까지도…!】 태평하기 그지없는 슬라임의 모습에 다시 한번 미궁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전보다 한층 더 거세진 강렬한 진동.

잔뜩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분홍 슬라임이 짐짓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별다른 사유 없이 서로에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웅웅- 공간을 울리는 힘 있는 목소리.
실시간으로 닉스가 죽인 몬스터들에게서 에너지를 얻게 된 슬라임이 제 미궁이 아님에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다.
분노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던 작은 새의 형상이 도로 제 모습을 되찾는다.
잔뜩 흔들리던 미궁의 진동이 뚝 멎었다.
한순간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슬라임의 모습에 작은 새가 조용히 제 감정을 가라앉혔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우리끼리 만든 규율은 그거였지.] […그래. 바로 지금 네놈과 저 쓰레기가 내 소중한 컬렉션들을 망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분명 내가 규율을 어긴 걸 테지만, 그 이유가 있다면 규율을 어긴 게 아니지.] […설마 이런 짓을 하는 데 이유가 있다는 거냐?] [응. 이유가 있어.] 덤덤히 내뱉은 슬라임의 모습에 작은 새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명을 바라는 게 분명한 그 눈빛에 슬라임이 퐁퐁 튀어 올랐다.
[얼마 전에 내가 꺼냈던 이야기 기억해?] […바깥 세상에 간섭한 녀석이 있다는 거 말인가? 허용된 범위를 넘겨서 괴상한 것들을 만들어 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응, 맞아. 정확하게 기억하네.] […그게 지금 네가 멋대로 내게 침입한 것과 무슨 상관이지?] [나는 멋대로 침입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규율을 어긴 녀석을 찾기 위해 조사차 방문한 거지.] 여느 때처럼 태평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작은 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네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도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자격이야 충분하지. 가장 먼저 이 사실을 눈치챈 건 나니까. 모두 게을러빠져서 가만히 놔뒀다간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니 직접 움직인 거잖아.] […이이! 그렇다면 내 컬렉션들을 죽인 건 뭐 때문이지? 단순한 조사를 위해서라면 내 수집품까지 건들 필요는 없을 텐데! 지금 저건 어디까지나 에너지를 약탈하기 위해서…!] [닉스가 하는 짓도 단순한 약탈이 아니야. 혹시나를 위해서 열심히 조사하는 것뿐이지. 저 중에 그 역겨운 키메라가 숨어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저 감옥 같은… 실례. 수납장 속에서 모종의 실험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 [001-002…! 네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너무 화내지 마, 002-046. 자꾸 그러면 확- 잡아먹고 싶잖아.]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는 슬라임의 목소리였음에도 작은 새는 그에 별다른 반발을 하지 못했다.
덤덤히 내뱉는 목소리 속에 감춰진 자그마한 진심을 느낀 까닭이다.

같은 미궁이라고 하더라도, 설령 비슷한 수준의 미궁이라 하더라도 그 격이란 게 있는 법이다.
애석하게도 작은 새는 분홍 슬라임에 비해 그 격이 한층 떨어졌다.
당장 지금에야 규율 때문에 가만히 있을 뿐이지, 저놈이라면 은근슬쩍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 홀라당 집어삼킬 수도 있는 놈이다.
아무리 미궁이란 것이 인류나 몬스터보다 한층 더 고차원적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죽음, 존재의 소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작은 새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번 일은 다른 녀석들한테 비밀로 해줘. 원래 이런 수사는 은밀함이 생명이거든.] 여전히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작은 새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수긍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여태껏 열심히 모아온 수집품들이 저놈의 쓰레기 같은 장난감을 갈가리 찢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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